성경적 복음이란? 이 글을 읽어 보시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페이지 정보
김성호 목사 23-02-26 10:54 view628 Comment0관련링크
본문
『묶임의 복음』
- 오수영 목사 -
(지구촌교회, RTS)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10:33)
“even as I try to please everyone in every way. For I am not seeking my own good but the good of many, so that they may be saved.”
사도 바울은 정말 ‘복음의 사람’이었다. 복음의 가치를 알았기에 이전에 최고 가치로 여겼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排泄物)’로 여길 줄 알았다(빌3:8). 그는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 모든 지식과 지혜의 보화가 들어 있음도 보았다(골2:3). 복음은 유일무이한 절대 가치가 있었기에 그는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결심했다(고전2:2). 그뿐 아니다. 유대주의자들이 할례를 믿음의 필수라고 내세울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노라고 확언했다(갈6:14).
그는 또한 복음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복음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롬1:16).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처형당했던 예수를 구원자로 믿는다는 것은 어쩌면 감추고 싶은 ‘수치’요 스캔들일 수도 있었다. 그런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게 된다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당연히도 미련하게 보였겠지만, 그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다른 것, 곧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다. 복음에는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여,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한다고 했다(롬1:17). 사도 바울의 복음 이해는 하늘만큼 높았고, 바다처럼 깊었고, 우주처럼 넓었다!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의 가치를 알고 자랑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복음의 능력’과 ‘복음의 가치’ 뿐 아니라 ‘복음의 정신’도 있었다. 바울의 복음은 단순한 복음이 아니고 ‘다면적’이고 ‘다층적’이었다. 그는 복음을 안 뒤부터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삶의 지침으로 삼기로 하였다. 그 결과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기로 하였다. 그는 복음이 주는 해방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아무것도 꺼릴 것이 없었고, 그가 복음 안에서 얻은 자유를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다시 묶는 ‘복음의 굴레’를 만들어 묶이기로 하였다. 그것은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라고 했다(고전9:19). 바울의 복음은 ‘자유케 하는 복음’이지만, 그의 복음은 ‘묶임의 복음’이기도 했다. 그는 우상에게 절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었으나 형제를 실족케 한다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고전8:13). 그가 자신의 권리를 다 쓰지 않고 범사에 참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고전9:12).
그의 복음은 ‘해방의 복음’만 아닌 많은 사람을 위한 ‘묶임의 복음’이었다. ‘해방(解放)’의 측면만 지나치게 강조하면 육신적, 정신적 방임주의로 흐르기 쉽고, ‘묶임’이 없는 복음은 ‘반쪽’ 복음으로 그치기 쉽다. 바울의 복음엔 ‘완전한 해방’ 뿐 아니라, ‘자발적 묶임’이 들어 있어서 일방적이지 않았고, 친근함, 따뜻함, 상냥함, 정중함이 묻어 있었다. 그래서 바울의 복음은 계층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 속으로 한없이 깊숙이 들어갈 수 있었다. 그의 복음은 유대인, 이방인 모두를 포괄하는 복음이었다. 또한 율법 있는 자, 율법 없는 자 모두를 포괄하는 복음이었다. ‘묶임’이 없는 해방은 모든 사람을 온전히 품기가 어렵다. 해방과 묶임이 함께 어우러질 때, 성경의 복음, 바울의 복음의 진면목(眞面目)이 드러난다.
우리는 정말이지 ‘해방의 복음’으로 참 행복하고 감사했다. 그 복음 때문에 현장을 줄기차게 나갈 수 있었고, 핍박도 기뻐하며 모든 것을 감수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는 이제 바울이 보여주는 ‘묶임의 복음’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것이 아닌가? 지금은 우리가 붙잡고 누려온 복음을 넘어서 정말 한 치의 더함이나 덜함 없는 ‘성경적(聖經的) 복음’이 필요한 시간이 아닌가?
오늘도 가장 좋은 임마누엘~ ^^
- 오수영 목사 -
(지구촌교회, RTS)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10:33)
“even as I try to please everyone in every way. For I am not seeking my own good but the good of many, so that they may be saved.”
사도 바울은 정말 ‘복음의 사람’이었다. 복음의 가치를 알았기에 이전에 최고 가치로 여겼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排泄物)’로 여길 줄 알았다(빌3:8). 그는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 모든 지식과 지혜의 보화가 들어 있음도 보았다(골2:3). 복음은 유일무이한 절대 가치가 있었기에 그는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결심했다(고전2:2). 그뿐 아니다. 유대주의자들이 할례를 믿음의 필수라고 내세울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노라고 확언했다(갈6:14).
그는 또한 복음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복음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롬1:16).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처형당했던 예수를 구원자로 믿는다는 것은 어쩌면 감추고 싶은 ‘수치’요 스캔들일 수도 있었다. 그런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게 된다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당연히도 미련하게 보였겠지만, 그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다른 것, 곧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다. 복음에는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여,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한다고 했다(롬1:17). 사도 바울의 복음 이해는 하늘만큼 높았고, 바다처럼 깊었고, 우주처럼 넓었다!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의 가치를 알고 자랑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복음의 능력’과 ‘복음의 가치’ 뿐 아니라 ‘복음의 정신’도 있었다. 바울의 복음은 단순한 복음이 아니고 ‘다면적’이고 ‘다층적’이었다. 그는 복음을 안 뒤부터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삶의 지침으로 삼기로 하였다. 그 결과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기로 하였다. 그는 복음이 주는 해방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아무것도 꺼릴 것이 없었고, 그가 복음 안에서 얻은 자유를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다시 묶는 ‘복음의 굴레’를 만들어 묶이기로 하였다. 그것은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라고 했다(고전9:19). 바울의 복음은 ‘자유케 하는 복음’이지만, 그의 복음은 ‘묶임의 복음’이기도 했다. 그는 우상에게 절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었으나 형제를 실족케 한다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고전8:13). 그가 자신의 권리를 다 쓰지 않고 범사에 참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고전9:12).
그의 복음은 ‘해방의 복음’만 아닌 많은 사람을 위한 ‘묶임의 복음’이었다. ‘해방(解放)’의 측면만 지나치게 강조하면 육신적, 정신적 방임주의로 흐르기 쉽고, ‘묶임’이 없는 복음은 ‘반쪽’ 복음으로 그치기 쉽다. 바울의 복음엔 ‘완전한 해방’ 뿐 아니라, ‘자발적 묶임’이 들어 있어서 일방적이지 않았고, 친근함, 따뜻함, 상냥함, 정중함이 묻어 있었다. 그래서 바울의 복음은 계층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 속으로 한없이 깊숙이 들어갈 수 있었다. 그의 복음은 유대인, 이방인 모두를 포괄하는 복음이었다. 또한 율법 있는 자, 율법 없는 자 모두를 포괄하는 복음이었다. ‘묶임’이 없는 해방은 모든 사람을 온전히 품기가 어렵다. 해방과 묶임이 함께 어우러질 때, 성경의 복음, 바울의 복음의 진면목(眞面目)이 드러난다.
우리는 정말이지 ‘해방의 복음’으로 참 행복하고 감사했다. 그 복음 때문에 현장을 줄기차게 나갈 수 있었고, 핍박도 기뻐하며 모든 것을 감수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는 이제 바울이 보여주는 ‘묶임의 복음’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것이 아닌가? 지금은 우리가 붙잡고 누려온 복음을 넘어서 정말 한 치의 더함이나 덜함 없는 ‘성경적(聖經的) 복음’이 필요한 시간이 아닌가?
오늘도 가장 좋은 임마누엘~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