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복음 | 요한복음, 사랑복음 ( 10 ) '죄'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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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ristian ] in KIDS
글쓴이(By): hbh (CCMG)
날 짜(Date): 1997년 11월 20일 목요일 15시 35분 24초 ROK
제 목(Title): ‘죄’의 의미
계속해서 요한복음의 메시지를 나누려고 합니다. ‘전적 타락’, ‘눈뜬 소경’이라는 글을 통해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남으로 인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철저히 마비되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흙을 바르셨을까?’ 어제 저희 동아리 성경공부 도중에 한 형제가 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왜 소경을 고치실 때 흙을 눈에 바르셨을까?’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많은 병자를 고치시는 가운데 단순히 말씀으로 치료하셨는데 말입니다. 그럼 요한복음 9장으로 다시 돌아가 보기로 합시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소경된 사람을 보게 됩니다. 소경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두시고 제자들이 소경을 보고 누구 죄 때문에 그러냐고 묻습니다. 유대인들은 질병, 재난, 죽음 등이 자신이나 부모의 죄에서 기인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3)
그렇다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무엇일까요? 위의 ‘안식일의 의미’를 읽어보신 분들은 금방 아실 것입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영적인 존재로 창조되어 온 세상을 다스리도록 완전한 축복을 받았습니다(창1:26-28). 그런데 인간이 사탄의 꾀임에 빠져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떠나 죄와 저주와 사탄의 권세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창3:1-6,17-19).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창3:15). 이 약속은 구약의 여러 가지 사건, 인물, 율법을 통해 지속적으로 선포되었고 마침내 2000년전 이 땅에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안식일 날 이 소경을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 일을 설명하시고자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에 ‘흙’을 바르셨던 것입니다. ‘흙’은 곧 죽음을 상징합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 뱀에게 저주를 내리면서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창3:14)의 ‘흙’의 의미도 ‘사망’을 의미하며 이 구절을 통해 사탄에게 ‘사망권세’가 주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에 흙을 바르신 것은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진리의 빛을 보게 하시어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로 ‘흙’을 빚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것과도 같은 의미와도 통한다고 봅니다. 여기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스스로 창조할 수 없고, 소경이 스스로 눈을 뜰 수 없듯이 우리가 하나님 떠난 결과로 죽은 영을 우리 스스로 살릴 수 없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 인간이 구원을 얻는 방법은 십자가에 달려 속죄의 피를 흘리시고 부활 하시어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요14:6). ‘실로암’이란 뜻은 ‘보냄을 받았다.’라는 뜻입니다. 소경이 실로암 연못에서 흙을 씻는 순간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세례를 받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주시리라.”(눅1:8)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요3:34)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즉,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성령을 받고 주님의 말씀하신 모든 것을 깨닫게 되는 진리의 눈이 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소경은 눈이 열림과 동시에 진리를 바라보는 눈이 열렸습니다. 소경의 부모는 아들이 눈이 열린 것으로 인해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할까봐 벌벌 떠는 반면 소경은 유대인들의 질문에 대해 이토록 담대하게 말합니다.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 하는도다.”(요9:30)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 하였으니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요9:32-33)
이에 유대인들이 이 말에 열을 받아서 ‘죄인인 네가 감히 우리를 가르치느냐’하면서 소경을 쫓아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소경을 만나 묻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요9:35-38)
즉 이 소경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 진리의 눈을 열어주심으로 말미암아오게 된 것입니다. 즉 이 믿음조차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이며 우리의의가 조금도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밝히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상하시게도 혹시 못 알아들은 사람들을 위해 지금까지의 사건과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다시 한 번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함이라 하시니.”(요9:39)
이 말을 들은 바리새인이 ‘그럼 우리도 소경인가’라고 묻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은 대답은 정말 명쾌하고 통쾌하기까지 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9:41)
이 말씀은 차라리 우리 자신이 소경이며 어떠한 진리도 알지 못함을 알았다면 죄가 없겠지만 스스로 볼 수 있고, 진리를 알 수 있고,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죄’(sin)라는 것의 원어적 의미는 ‘과녘에서 빗나가다’입니다. 궁사에게 중요한 것은 활이 얼마나 좋으냐 살이 얼마나 빠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로 쏘느냐입니다.
대구에서 서울을 가기위해 경부 고속도로에 들어서는 차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표지판이 없어 어느 한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 차는 있는 힘을 다해 열심히 서울을 향해 달렸습니다. 운전사의 운전 실력은 너무도 뛰어나 단 1시간만에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부산이었습니다.
그 차의 운전사에게 있어 문제는 운전 실력이나 성실함이 아니었습니다. 그 운전사에게는 오직 방향을 잘 못잡은 사실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지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16:9)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의 길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신다면 예수님을 여러분의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 권세를 회복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다면 우리가 바로 그 소경이었고 주님의 완벽하신 은혜에 힘입어 구원받았다는 그 사실 하나로 인해 얼마나 감사해야 하는가를 깨달으시길 기도합니다. hbh
글쓴이(By): hbh (CCMG)
날 짜(Date): 1997년 11월 20일 목요일 15시 35분 24초 ROK
제 목(Title): ‘죄’의 의미
계속해서 요한복음의 메시지를 나누려고 합니다. ‘전적 타락’, ‘눈뜬 소경’이라는 글을 통해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남으로 인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철저히 마비되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흙을 바르셨을까?’ 어제 저희 동아리 성경공부 도중에 한 형제가 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왜 소경을 고치실 때 흙을 눈에 바르셨을까?’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많은 병자를 고치시는 가운데 단순히 말씀으로 치료하셨는데 말입니다. 그럼 요한복음 9장으로 다시 돌아가 보기로 합시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소경된 사람을 보게 됩니다. 소경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두시고 제자들이 소경을 보고 누구 죄 때문에 그러냐고 묻습니다. 유대인들은 질병, 재난, 죽음 등이 자신이나 부모의 죄에서 기인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3)
그렇다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무엇일까요? 위의 ‘안식일의 의미’를 읽어보신 분들은 금방 아실 것입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영적인 존재로 창조되어 온 세상을 다스리도록 완전한 축복을 받았습니다(창1:26-28). 그런데 인간이 사탄의 꾀임에 빠져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떠나 죄와 저주와 사탄의 권세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창3:1-6,17-19).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창3:15). 이 약속은 구약의 여러 가지 사건, 인물, 율법을 통해 지속적으로 선포되었고 마침내 2000년전 이 땅에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안식일 날 이 소경을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 일을 설명하시고자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에 ‘흙’을 바르셨던 것입니다. ‘흙’은 곧 죽음을 상징합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 뱀에게 저주를 내리면서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창3:14)의 ‘흙’의 의미도 ‘사망’을 의미하며 이 구절을 통해 사탄에게 ‘사망권세’가 주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에 흙을 바르신 것은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진리의 빛을 보게 하시어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로 ‘흙’을 빚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것과도 같은 의미와도 통한다고 봅니다. 여기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스스로 창조할 수 없고, 소경이 스스로 눈을 뜰 수 없듯이 우리가 하나님 떠난 결과로 죽은 영을 우리 스스로 살릴 수 없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 인간이 구원을 얻는 방법은 십자가에 달려 속죄의 피를 흘리시고 부활 하시어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요14:6). ‘실로암’이란 뜻은 ‘보냄을 받았다.’라는 뜻입니다. 소경이 실로암 연못에서 흙을 씻는 순간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세례를 받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주시리라.”(눅1:8)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요3:34)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즉,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성령을 받고 주님의 말씀하신 모든 것을 깨닫게 되는 진리의 눈이 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소경은 눈이 열림과 동시에 진리를 바라보는 눈이 열렸습니다. 소경의 부모는 아들이 눈이 열린 것으로 인해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할까봐 벌벌 떠는 반면 소경은 유대인들의 질문에 대해 이토록 담대하게 말합니다.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 하는도다.”(요9:30)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 하였으니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요9:32-33)
이에 유대인들이 이 말에 열을 받아서 ‘죄인인 네가 감히 우리를 가르치느냐’하면서 소경을 쫓아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소경을 만나 묻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요9:35-38)
즉 이 소경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 진리의 눈을 열어주심으로 말미암아오게 된 것입니다. 즉 이 믿음조차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이며 우리의의가 조금도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밝히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상하시게도 혹시 못 알아들은 사람들을 위해 지금까지의 사건과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다시 한 번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함이라 하시니.”(요9:39)
이 말을 들은 바리새인이 ‘그럼 우리도 소경인가’라고 묻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은 대답은 정말 명쾌하고 통쾌하기까지 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9:41)
이 말씀은 차라리 우리 자신이 소경이며 어떠한 진리도 알지 못함을 알았다면 죄가 없겠지만 스스로 볼 수 있고, 진리를 알 수 있고,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죄’(sin)라는 것의 원어적 의미는 ‘과녘에서 빗나가다’입니다. 궁사에게 중요한 것은 활이 얼마나 좋으냐 살이 얼마나 빠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로 쏘느냐입니다.
대구에서 서울을 가기위해 경부 고속도로에 들어서는 차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표지판이 없어 어느 한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 차는 있는 힘을 다해 열심히 서울을 향해 달렸습니다. 운전사의 운전 실력은 너무도 뛰어나 단 1시간만에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부산이었습니다.
그 차의 운전사에게 있어 문제는 운전 실력이나 성실함이 아니었습니다. 그 운전사에게는 오직 방향을 잘 못잡은 사실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지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16:9)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의 길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신다면 예수님을 여러분의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 권세를 회복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다면 우리가 바로 그 소경이었고 주님의 완벽하신 은혜에 힘입어 구원받았다는 그 사실 하나로 인해 얼마나 감사해야 하는가를 깨달으시길 기도합니다. hb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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