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 인본주의와 상황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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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ristian ] in KIDS
글쓴이(By): hbh (CCMG)
날 짜(Date): 1998년 04월 07일 화요일 18시 26분 55초 ROK
제 목(Title): 인본주의와 상황윤리
일단 sca님, albatros님께.
제가 전달하려는 의도에서 빗나간 것 같습니다. 저는 복음이 사라진 기독교의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서 ‘인본주의’라는 말을 쓴 것이지 인본주의 때문에 교회가 타락했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인본주의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하기로 하겠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인본주의’의 뜻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제가 말씀드린 ‘인본주의’는 ‘신본주의=하나님 중심’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보통 ‘휴머니즘’의 뜻으로 쓰이는 ‘인본주의’가 ‘인간 사이의 사랑’을 뜻한다면 그것은 ‘신본주의’와 반대의 뜻이 아닙니다. 사랑은 하나님께로서 났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우리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으니까요. 아무튼 오해의 소지를 남긴 것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이하 글에서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배제하고 인간의 논리로만 생각하는 것을 ‘인본주의’라고 칭하기로 합니다.
하나님 떠난 ‘인본주의’사상의 예로 ‘상황윤리’를 들었었습니다. ‘상황윤리’란 선과 악의 절대적인 기준은 없으며 상황에 따라 선도, 악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래는 경동교회 강원용 목사님의 ‘상황과 윤리’라는 강의 중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
“상황에 따라서 다른 상황에서는 선이 되는 것이 이런 상황에서는 악이 될 수 있고, 이런 상황에서는 악이 되는 것이 다른 상황에서는 선이 될 수 있다. 상황에 따라서 정해져야 된다. 그러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 사람은 미국 사람답게 책 속에다 구체적인 예를 많이 들었습니다. 살인하지 마라는 계율이 있어요. 그런데 살인해야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살인하는 것이 악이 아니라 선이 되는 경우가 있다며, 그런 것의 예 중의 하나를 목사이자 신학자인 독일의 본 훼퍼(Dietrich Bonhoeffer)를 들었습니다. 본 훼퍼는 히틀러를 암살하려했다가 발각되어 사형당한 사람입니다. 히틀러 한 사람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빼앗기는 때에, 히틀러를 살인하는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유명한 본 훼퍼의 이야기에, 술이 잔득 취한 주정뱅이가 자동차를 몰고 가면서 이 사람도 치고 저 사람도 치고 하면서 달아나는데, 그런 운전수를 어떻게 할것인가? 차에 뛰어 올라가서 끌어내리는 거다. 그것 밖에 다른 도리가 없지않느냐? 라는 이야기입니다.
낙태를 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이라고 규정되던 때에 나온 이야기입니다만, 어떤 정신병자가 정신병원에서 어느 정신병자에게 강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가 아기를 가졌는데, 그런 아기를 과연 낳아야 되느냐? 낙태를 시키는 것은 어린 생명을 죽이는 것이지만, 이 상황에서는 옳은 일이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이 기가 막힌 예를 여러 가지 들었는데, 가령 스코트랜드의 이야기를 봅시다.
인디언들이 백인을 보면 다 죽이곤 했는데, 인디언들을 피해서 사람들이 길을 가고 있는 도중, 어떤 여자가 병이 들어서 우는 어린 아이를 데리고 있었습니다. 이 아기는 자기 아이인데, 이 아기가 왕 하고 울게 되면 그 인디언들이 사람이 있는 것을 알고 이 사람들을 다 죽이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가 막히지만 자기 병든 아이를 이 여자는 죽였습니다. 다른 사람 살리기 위해서. 그것이 어머니로서 할 일이 아니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 아기를 죽인 것을 악이라고 잘못했다고 말할수 가 없다는 겁니다.
‘간음하지 마라’도 다 지켜야 하는 도덕인데, 간음을 하는 것이 선인 경우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 예로 든 것이, 제 2차 세계대전 때 소련군에게 잡혀간 포로였던 버그마이어(Bergmeier)라는 독일여자가 있었습니다. 어린 아이와 남편을 가진 여자였는데, 이 사람이 포로 수용소에 갇혔습니다. 그 여자는 우연히 포로 수용소 안에서도 자기 남편과 아이들이 건재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여자는 무슨 방법으로든지 여기를 빠져나와 남편의 곁으로 돌아가야겠는데, 이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나가는 방법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아기를 임신한 경우에는 석방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포로 수용소의 간수하고 간통을 해서 이 여자는 임신을 하게 되고 석방이 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남편은 그 버그마이어를 반갑게 맞이했고, 옥중의 아기 또한 버그마이어의 아이들이 귀여워해주고, 그 남편 또한 이 어린아이를 안고 세례까지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버그마이어 여사의 행위를 간음을 행했으니까 악이라고 해야하느냐?
이런 예를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조국을 위해서 싸우던 군인이 포로가 되어갔을 때, 국가의 기밀을 말하라고 상대편에서 고문을 할 때,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것은 자기 동족과 나라를 망치는 일인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거짓말을 한다면 잘못이겠습니까? 풀레처라는 사람은 우리가 다 악이다 하는 것도 상황에 따라서 선이 될 수도 있고, 선이다라고 하는 것이 상황에 따라서 악이 될 수 있다. 상황이 문제를 결정하는 것이다 라고 주장 하였습니다.”
**************** 강원용 목사님 강의 중
상황 윤리는 나의 입장에서 어떻게 되어야한다는 것을 이미 정해놓고 판단의 기준을 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선악의 기준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순간 모든 사람은 죄인이 되었고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는 우리의 어떠한 행동도 불변의 ‘선’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상황 윤리’도 성립할 수 있고 절대적인 선이 없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우리 가운데 임재하고 역사하시며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선을 이루실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을 주셨다면 그 해답은 하나님께 있는것이고 분명 그 사건을 통해 우리로 깨닫게 하시려는 숨은 계획이 있을 것입니다. 다니엘은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창문을 열고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우상의 신상 앞에 절하지 않고 풀못 불에 들어가는 것을 택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의 질문에 대해 그들이 한 말이 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3:16-18)
예수님도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겟세마네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29)
스데반 또한 단 한마디의 변명으로 살아나올 수 있는 자리에서 담대히 복음을 증거한 후 돌에 맞고 잠들어 천국에 갔습니다. 베드로도 대제사장 앞에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예수’를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나 감옥에 잡혀 들어가서 죽음이 앞에 놓인 상황에서도 천사를 보내셔서 옥문을 여시고 베드로를 구출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상황 윤리적’인 상황에서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의 뜻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나의 원하는 바가 있더라도 결국은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우리가 지켜야 할 ‘상황 윤리’인 것입니다. 감리교 신학대학에 다니던 제 친구가 이런 상황윤리를 배우면서 매우 고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궤변에 빠지다 보면 결국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고 까지 발전하게 되고 결국은 ‘오직 예수만이 그리스도’라는 성경적 진리까지 부정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고 합니다.
실제적으로 감리교 신학대학 교수 중 한 분은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종교 다원론을 외치기도 하셨고 지금 재직하고 계신 분 중에도 ‘부활’을 부인하는 신학을 가르치시는 분도 계십니다. 부활을 믿는 신입생이 들어오면 수준 이하라는 취급을 받는다고 할 정도로 감리교 신학은 세속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시고 성령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를 인도 하시고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어떤 급박한 상황에서도 우리가 이 사실만 놓치지 않는다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최고의 ‘선’으로 이끄 실 것입니다. 선악을 판단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라면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창조되었지만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완전한 인격체로 창조하셨기에 그것을 잊지 않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선악과’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선악을 아는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도 가질 수 있다고 하면서 유혹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5)
사탄의 말대로 우리는 선악을 알게 되었으나 그 때는 이미 우리는 하나님을 떠났고 영적으로 죽어버린 상태였습니다. 우리는 죄악 가운데 빠졌고 흑암 세력의 권세 아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선악을 알 수는 있었지만 영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반복되는 죄악과 사탄의 세력을 이길 아무런 능력이 없게 되었습니다. 오직 선악을 아는 것은 무한하신 창조의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만의 일이었습니다.
결국 ‘상황 윤리’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능력이 없는 우리를 타락시켜 죄와 저주의 고통 가운데 빠뜨렸던 사탄의 속임수와 같은 맥락입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 그것이 옳다, 그르다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선악을 분별할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판단의 기준이 없을 뿐더러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룰만한 능력도, 악을 심판할 능력도 없습니다.
하나님 떠난 우리 속에는 진리가 거하지 못하고 거짓의 영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조차도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3:9)
그는 하나님의 지혜로 아이를 놓고 싸우는 재판을 해결합니다. 아이를 반으로 가르라는 판결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전혀 상황에 맞지 않는 판결이었을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저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왕상3:28)
사실상 우리는 정말로 ‘선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별하지 조차 못함에도 불구하고 눈금 없는 잣대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우리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절대적으로 틀린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참 재판관은 여호와 하나님 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12:14)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죄를 용서받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함께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마음과 생각을 지키십니다. 우리 안에 진리가 거하므로 우리가 이제 진리의 눈으로 모든 상황을 바라보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위기의 상황도 최고의 응답으로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율법의 눈으로는 살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복음의 눈으로는 죽을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말씀 안에 거하고 성장하여 그리스도를 풍성하게 누릴 때 비로소 우리는 참 선악을 분별할 줄 알게 됩니다.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5:14)
저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임을 확신합니다. 그분은상대적이지도 않고 상황에 따라 변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영적인 사실은 시대가 바뀌어도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리라는 약속 또한 영원히 변치 않을 것입니다.
오직 예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우리 모든 문제의 해결자가 되십니다. hbh
글쓴이(By): hbh (CCMG)
날 짜(Date): 1998년 04월 07일 화요일 18시 26분 55초 ROK
제 목(Title): 인본주의와 상황윤리
일단 sca님, albatros님께.
제가 전달하려는 의도에서 빗나간 것 같습니다. 저는 복음이 사라진 기독교의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서 ‘인본주의’라는 말을 쓴 것이지 인본주의 때문에 교회가 타락했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인본주의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하기로 하겠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인본주의’의 뜻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제가 말씀드린 ‘인본주의’는 ‘신본주의=하나님 중심’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보통 ‘휴머니즘’의 뜻으로 쓰이는 ‘인본주의’가 ‘인간 사이의 사랑’을 뜻한다면 그것은 ‘신본주의’와 반대의 뜻이 아닙니다. 사랑은 하나님께로서 났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우리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으니까요. 아무튼 오해의 소지를 남긴 것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이하 글에서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배제하고 인간의 논리로만 생각하는 것을 ‘인본주의’라고 칭하기로 합니다.
하나님 떠난 ‘인본주의’사상의 예로 ‘상황윤리’를 들었었습니다. ‘상황윤리’란 선과 악의 절대적인 기준은 없으며 상황에 따라 선도, 악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래는 경동교회 강원용 목사님의 ‘상황과 윤리’라는 강의 중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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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에 따라서 다른 상황에서는 선이 되는 것이 이런 상황에서는 악이 될 수 있고, 이런 상황에서는 악이 되는 것이 다른 상황에서는 선이 될 수 있다. 상황에 따라서 정해져야 된다. 그러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 사람은 미국 사람답게 책 속에다 구체적인 예를 많이 들었습니다. 살인하지 마라는 계율이 있어요. 그런데 살인해야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살인하는 것이 악이 아니라 선이 되는 경우가 있다며, 그런 것의 예 중의 하나를 목사이자 신학자인 독일의 본 훼퍼(Dietrich Bonhoeffer)를 들었습니다. 본 훼퍼는 히틀러를 암살하려했다가 발각되어 사형당한 사람입니다. 히틀러 한 사람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빼앗기는 때에, 히틀러를 살인하는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유명한 본 훼퍼의 이야기에, 술이 잔득 취한 주정뱅이가 자동차를 몰고 가면서 이 사람도 치고 저 사람도 치고 하면서 달아나는데, 그런 운전수를 어떻게 할것인가? 차에 뛰어 올라가서 끌어내리는 거다. 그것 밖에 다른 도리가 없지않느냐? 라는 이야기입니다.
낙태를 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이라고 규정되던 때에 나온 이야기입니다만, 어떤 정신병자가 정신병원에서 어느 정신병자에게 강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가 아기를 가졌는데, 그런 아기를 과연 낳아야 되느냐? 낙태를 시키는 것은 어린 생명을 죽이는 것이지만, 이 상황에서는 옳은 일이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이 기가 막힌 예를 여러 가지 들었는데, 가령 스코트랜드의 이야기를 봅시다.
인디언들이 백인을 보면 다 죽이곤 했는데, 인디언들을 피해서 사람들이 길을 가고 있는 도중, 어떤 여자가 병이 들어서 우는 어린 아이를 데리고 있었습니다. 이 아기는 자기 아이인데, 이 아기가 왕 하고 울게 되면 그 인디언들이 사람이 있는 것을 알고 이 사람들을 다 죽이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가 막히지만 자기 병든 아이를 이 여자는 죽였습니다. 다른 사람 살리기 위해서. 그것이 어머니로서 할 일이 아니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 아기를 죽인 것을 악이라고 잘못했다고 말할수 가 없다는 겁니다.
‘간음하지 마라’도 다 지켜야 하는 도덕인데, 간음을 하는 것이 선인 경우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 예로 든 것이, 제 2차 세계대전 때 소련군에게 잡혀간 포로였던 버그마이어(Bergmeier)라는 독일여자가 있었습니다. 어린 아이와 남편을 가진 여자였는데, 이 사람이 포로 수용소에 갇혔습니다. 그 여자는 우연히 포로 수용소 안에서도 자기 남편과 아이들이 건재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여자는 무슨 방법으로든지 여기를 빠져나와 남편의 곁으로 돌아가야겠는데, 이 수용소에서 석방되어 나가는 방법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아기를 임신한 경우에는 석방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포로 수용소의 간수하고 간통을 해서 이 여자는 임신을 하게 되고 석방이 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남편은 그 버그마이어를 반갑게 맞이했고, 옥중의 아기 또한 버그마이어의 아이들이 귀여워해주고, 그 남편 또한 이 어린아이를 안고 세례까지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버그마이어 여사의 행위를 간음을 행했으니까 악이라고 해야하느냐?
이런 예를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조국을 위해서 싸우던 군인이 포로가 되어갔을 때, 국가의 기밀을 말하라고 상대편에서 고문을 할 때,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것은 자기 동족과 나라를 망치는 일인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거짓말을 한다면 잘못이겠습니까? 풀레처라는 사람은 우리가 다 악이다 하는 것도 상황에 따라서 선이 될 수도 있고, 선이다라고 하는 것이 상황에 따라서 악이 될 수 있다. 상황이 문제를 결정하는 것이다 라고 주장 하였습니다.”
**************** 강원용 목사님 강의 중
상황 윤리는 나의 입장에서 어떻게 되어야한다는 것을 이미 정해놓고 판단의 기준을 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선악의 기준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순간 모든 사람은 죄인이 되었고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는 우리의 어떠한 행동도 불변의 ‘선’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상황 윤리’도 성립할 수 있고 절대적인 선이 없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우리 가운데 임재하고 역사하시며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선을 이루실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을 주셨다면 그 해답은 하나님께 있는것이고 분명 그 사건을 통해 우리로 깨닫게 하시려는 숨은 계획이 있을 것입니다. 다니엘은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창문을 열고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우상의 신상 앞에 절하지 않고 풀못 불에 들어가는 것을 택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의 질문에 대해 그들이 한 말이 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3:16-18)
예수님도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겟세마네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29)
스데반 또한 단 한마디의 변명으로 살아나올 수 있는 자리에서 담대히 복음을 증거한 후 돌에 맞고 잠들어 천국에 갔습니다. 베드로도 대제사장 앞에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예수’를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나 감옥에 잡혀 들어가서 죽음이 앞에 놓인 상황에서도 천사를 보내셔서 옥문을 여시고 베드로를 구출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상황 윤리적’인 상황에서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의 뜻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나의 원하는 바가 있더라도 결국은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우리가 지켜야 할 ‘상황 윤리’인 것입니다. 감리교 신학대학에 다니던 제 친구가 이런 상황윤리를 배우면서 매우 고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궤변에 빠지다 보면 결국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고 까지 발전하게 되고 결국은 ‘오직 예수만이 그리스도’라는 성경적 진리까지 부정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고 합니다.
실제적으로 감리교 신학대학 교수 중 한 분은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종교 다원론을 외치기도 하셨고 지금 재직하고 계신 분 중에도 ‘부활’을 부인하는 신학을 가르치시는 분도 계십니다. 부활을 믿는 신입생이 들어오면 수준 이하라는 취급을 받는다고 할 정도로 감리교 신학은 세속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시고 성령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를 인도 하시고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어떤 급박한 상황에서도 우리가 이 사실만 놓치지 않는다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최고의 ‘선’으로 이끄 실 것입니다. 선악을 판단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라면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창조되었지만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완전한 인격체로 창조하셨기에 그것을 잊지 않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선악과’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선악을 아는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도 가질 수 있다고 하면서 유혹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5)
사탄의 말대로 우리는 선악을 알게 되었으나 그 때는 이미 우리는 하나님을 떠났고 영적으로 죽어버린 상태였습니다. 우리는 죄악 가운데 빠졌고 흑암 세력의 권세 아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선악을 알 수는 있었지만 영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반복되는 죄악과 사탄의 세력을 이길 아무런 능력이 없게 되었습니다. 오직 선악을 아는 것은 무한하신 창조의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만의 일이었습니다.
결국 ‘상황 윤리’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능력이 없는 우리를 타락시켜 죄와 저주의 고통 가운데 빠뜨렸던 사탄의 속임수와 같은 맥락입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 그것이 옳다, 그르다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선악을 분별할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판단의 기준이 없을 뿐더러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룰만한 능력도, 악을 심판할 능력도 없습니다.
하나님 떠난 우리 속에는 진리가 거하지 못하고 거짓의 영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조차도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3:9)
그는 하나님의 지혜로 아이를 놓고 싸우는 재판을 해결합니다. 아이를 반으로 가르라는 판결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전혀 상황에 맞지 않는 판결이었을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저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왕상3:28)
사실상 우리는 정말로 ‘선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별하지 조차 못함에도 불구하고 눈금 없는 잣대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우리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절대적으로 틀린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참 재판관은 여호와 하나님 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12:14)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죄를 용서받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함께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마음과 생각을 지키십니다. 우리 안에 진리가 거하므로 우리가 이제 진리의 눈으로 모든 상황을 바라보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위기의 상황도 최고의 응답으로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율법의 눈으로는 살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복음의 눈으로는 죽을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말씀 안에 거하고 성장하여 그리스도를 풍성하게 누릴 때 비로소 우리는 참 선악을 분별할 줄 알게 됩니다.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5:14)
저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임을 확신합니다. 그분은상대적이지도 않고 상황에 따라 변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영적인 사실은 시대가 바뀌어도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리라는 약속 또한 영원히 변치 않을 것입니다.
오직 예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우리 모든 문제의 해결자가 되십니다. hb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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