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과 성 | [00017] 사랑과 성, 그리고 언약 (3) 아가서는 너무 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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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20-05-28 02:18 view12,312 Comment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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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ristian ] in KIDS
글쓴이(By): hbh (CCMG)
날 짜(Date): 1998년 10월 29일 목요일 오후 10시 36분 27초
제 목(Title): 아가서는 너무 야하다.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쾌락하게 하는구나.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네 유방은 그 열매송이 같구나.
내가 말하기를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가지를 잡으리라 하였나니 네 유방은 포도송이 같고 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 네 입은 좋은 포도주 같을 것이니라.
이 포도주는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미끄럽게 흘러내려서 자는 자의 입으로 움직이게 하느니라.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우리가 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서 내가 나의 사랑을 네게 주리라.”(아7:6-12)
솔로몬이 쓴 사랑의 시, 아가서의 한 부분입니다. 성경에는 어울리지 않을 법한 야한 표현들이 많이 있습니다. 3,000년이 지난 지금의 사랑 노래보다도 오히려 우리를 설레게 하는 아름다운 글입니다. 하지만, 중세의 향락, 부패에 반대해 일어난 수도원 운동 이후, 기독교는 급속도로 금욕주의화 되어갔고, 아가서는 정경에서 빠질 뻔한 위기를 여러 번 겪게 됩니다.
생각해보니, 수도승들이 수도원에서 아가서를 읊조리는 모습은 좀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실, 요즘도 아가서는 강단에서 잘 오르지 않는 말씀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구절이라고 해보아야 김성일 씨의 간증 책 제목으로 유명한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아8:6) 정도일 것입니다. 그 이유도 아마, 이전의 글에서 말한 바와 같이, 기독교적 분위기와 ‘성’과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듯한 관념 때문일 것입니다.
성경에는 ‘성’의 타락 때문에 실패한 예들이 많이 등장하고 우상숭배를 음녀의 성적타락으로 비유하는 등, 성의 부정적인 면이 더 많이 나옵니다. 바울도 결혼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그 자신이 사도가 된 후 독신이었기에 그런지 성에 대해 많은 부분을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율법에는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다고 하니, 성에 대해 느끼는 자신의 어떠한 감정을 너무 ‘죄’로만 몰아가게 되고, 결국 부정적인 성에 대한 관념을 낳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청년 크리스천으로서 첨예한 ‘성 문제’를 시원하게 풀어줄 성경구절이 없을까하여 성경을 이리저리 뒤적인 기억이 여러분들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서 오히려 저는 더욱 혼란스러운 경우를 많이 당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 혹은 성 윤리의 개념이 너무나 특이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집니다)
hbh
글쓴이(By): hbh (CCMG)
날 짜(Date): 1998년 10월 29일 목요일 오후 10시 36분 27초
제 목(Title): 아가서는 너무 야하다.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쾌락하게 하는구나.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네 유방은 그 열매송이 같구나.
내가 말하기를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가지를 잡으리라 하였나니 네 유방은 포도송이 같고 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 네 입은 좋은 포도주 같을 것이니라.
이 포도주는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미끄럽게 흘러내려서 자는 자의 입으로 움직이게 하느니라.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우리가 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서 내가 나의 사랑을 네게 주리라.”(아7:6-12)
솔로몬이 쓴 사랑의 시, 아가서의 한 부분입니다. 성경에는 어울리지 않을 법한 야한 표현들이 많이 있습니다. 3,000년이 지난 지금의 사랑 노래보다도 오히려 우리를 설레게 하는 아름다운 글입니다. 하지만, 중세의 향락, 부패에 반대해 일어난 수도원 운동 이후, 기독교는 급속도로 금욕주의화 되어갔고, 아가서는 정경에서 빠질 뻔한 위기를 여러 번 겪게 됩니다.
생각해보니, 수도승들이 수도원에서 아가서를 읊조리는 모습은 좀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실, 요즘도 아가서는 강단에서 잘 오르지 않는 말씀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구절이라고 해보아야 김성일 씨의 간증 책 제목으로 유명한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아8:6) 정도일 것입니다. 그 이유도 아마, 이전의 글에서 말한 바와 같이, 기독교적 분위기와 ‘성’과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듯한 관념 때문일 것입니다.
성경에는 ‘성’의 타락 때문에 실패한 예들이 많이 등장하고 우상숭배를 음녀의 성적타락으로 비유하는 등, 성의 부정적인 면이 더 많이 나옵니다. 바울도 결혼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그 자신이 사도가 된 후 독신이었기에 그런지 성에 대해 많은 부분을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율법에는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다고 하니, 성에 대해 느끼는 자신의 어떠한 감정을 너무 ‘죄’로만 몰아가게 되고, 결국 부정적인 성에 대한 관념을 낳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청년 크리스천으로서 첨예한 ‘성 문제’를 시원하게 풀어줄 성경구절이 없을까하여 성경을 이리저리 뒤적인 기억이 여러분들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서 오히려 저는 더욱 혼란스러운 경우를 많이 당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 혹은 성 윤리의 개념이 너무나 특이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집니다)
hb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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