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과 성 | [00015] 사랑과 성, 그리고 언약 (1) 사랑은 언제 시작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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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시작
“우리가 서로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5:19)
[ Christian ] in KIDS
글쓴이(By): hbh (CCMG)
날 짜(Date): 1998년 6월 17일 수요일 오후 05시 00분 19초
제 목(Title): 사랑은 언제 시작 되었나?
가요의 대부분은 사랑 노래입니다. 요즈음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을 노래한 곡이 많이 등장하고 있기도 합니다. 드라마를 보아도 한때 사랑했던 남녀가 결혼 후 갈등하고 이별하는 모습을 그린 것들이 많습니다. 점점 암울해 가는 세태를 반영한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임은 분명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였고 수많은 예술작품들이 그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에 대해 가장 많이 언급하고 있는 책은 성경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가장 소중하고 영원한 것은 사랑이다.’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성경에서의 사랑은 항상 전제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주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시면서 이 말씀을 항상 잊지 않으십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는 주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자는 서로를 진정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성경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언제 처음 나오는지 찾아보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할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
100살이 넘어서 기적적으로 얻은 자식이 바로 이삭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아브라함은 조금도 주저함 없이 그 아들을 바치려 했을까요? 그 비밀은 이삭의 출생과정에 있습니다. 이삭의 출생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네가 ‘사라로부터 아들을 낳으리라’고 말했을 때 얼마나 믿어지지 않았던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사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구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창17:17)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낡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오.”(창18:12)
이러한 그들의 불신앙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창18:13)
그들의 웃음 때문인지 주님은 사라가 잉태할 아들의 이름을 ‘이삭=웃음’이라고 지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기가 막혀서 웃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출생으로 인하여 그들에게 기쁨 넘칠 것임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 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창17:19)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통하여 언약을 세운다고 하셨고 또 그 바로 전에는 아브라함의 씨로 말미암아 만민이 복을 얻을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삭은 그 축복의 근원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무슨 이유로 그 고귀한 씨를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을까요?
성경을 계속 묵상하던 도중에 ‘이삭’의 탄생과 그에 대한 예언이 ‘예수님’과 매우 비슷하다는 것이 떠올랐습니다. 첫 번째는 초자연적인 잉태에 대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마리아의 불신앙에 대해 천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눅1:34)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눅1:27)
이삭과 예수님의 공통점은 그 이름에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잉태할 아들의 이름을 직접 지어주심과 동시에 언약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니라 하니라.”(마1:21)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러 가는 과정에 있어서 삼일 길을 걸어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으로 갑니다. 그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이삭으로 하여금 직접 지고 가게 만듭니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이삭은 ‘번제’는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은 굳건했습니다. 비록 자기의 생명보다 사랑하는 아들이지만 그 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리라.”(창22:8)
이삭은 놀랍도록 순종했습니다. 그 자신이 결박당하여 나무 위에 놓였을 때도 그는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십자가에 친히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바로 그 모습인 것입니다. 칼을 들고 이삭을 막 내려치려 하는 순간 여호와의 사자가 드디어 아브라함을 부릅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구약에서 ‘성자 하나님’으로 자주 해석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 자신이 직접 이룰 구속의 사역을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깊이 깨닫도록 하신 것입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치려 한 순간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사랑이 확인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바라보니 ‘수양’이 수풀에 걸려 있었습니다. 번제로 바칠 제물은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번제인 ‘수양’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그 수양의 피는 유월절 출애굽을 이룬 ‘어린양의 피’이고, 제단에 뿌린 ‘화목제’, 지성소에 뿌린 ‘속죄제’의 피입니다. 결국 그 모든 것은 십자가에서 주님이 흘리실 보혈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땅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여호와께서 준비 하신다’라고 칭하여 그 사건을 길이 후대에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영원한 속죄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민이 복을 얻게 될 것임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그 씨로 인하여 대적의 문을 얻어 사탄의 세력을 꺾고, 그 복음이 세계만방에 전파될 것임을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한사람의 순종으로 인해 만민이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 하였음이니라.”(창22:17-18)
성경은 ‘사랑’이라는 단어의 등장에 있어서 이토록 엄청난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다름 아닌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 또한 서로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5:19)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 하는 것이 마땅하노라.”(요일5:10-11)
거꾸로 말하면 사랑을 모르는 자는 곧 하나님을 모르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요일5:7-8). 하나님과 함께 완전한 축복을 받도록 지음 받았던 우리가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떠나 사탄의 저주에 사로잡히게 된 그 절망 속에서 우리를 건져내신 십자가의 사랑을 모른다면 우린 진정 사랑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육적으로 훌륭한 사랑이라도 그의 근본문제, 영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참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사랑입니다.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도와주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권세와 축복을 알도록 하는 것 이상의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의 범람 속에 의미를 잃어가는 주님의 참사랑의 회복이 절실한 때입니다.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랑을 몰라 고통 받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수천 수만 가지의 문제가 있겠지만 모든 원인은 하나님을 떠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그 결과는 때로는 기아로, 귀신들림, 불치병, 정신병 등으로 나타나며 결국 영원한 지옥의 고통으로 끝을 맺습니다. 우리가 진정 그 사랑을 소유한 자라면, 우리는 당연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가장 큰 소원이며 지금도 이 지구를 운행하시는 유일한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
‘나는 너를 사랑한다.’ 조금은 조심스러워야 할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깨닫는다면 말입니다.
hbh
“우리가 서로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5:19)
[ Christian ] in KIDS
글쓴이(By): hbh (CCMG)
날 짜(Date): 1998년 6월 17일 수요일 오후 05시 00분 19초
제 목(Title): 사랑은 언제 시작 되었나?
가요의 대부분은 사랑 노래입니다. 요즈음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을 노래한 곡이 많이 등장하고 있기도 합니다. 드라마를 보아도 한때 사랑했던 남녀가 결혼 후 갈등하고 이별하는 모습을 그린 것들이 많습니다. 점점 암울해 가는 세태를 반영한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임은 분명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였고 수많은 예술작품들이 그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에 대해 가장 많이 언급하고 있는 책은 성경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가장 소중하고 영원한 것은 사랑이다.’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성경에서의 사랑은 항상 전제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주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시면서 이 말씀을 항상 잊지 않으십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는 주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자는 서로를 진정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성경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언제 처음 나오는지 찾아보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할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
100살이 넘어서 기적적으로 얻은 자식이 바로 이삭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아브라함은 조금도 주저함 없이 그 아들을 바치려 했을까요? 그 비밀은 이삭의 출생과정에 있습니다. 이삭의 출생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네가 ‘사라로부터 아들을 낳으리라’고 말했을 때 얼마나 믿어지지 않았던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사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구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창17:17)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낡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오.”(창18:12)
이러한 그들의 불신앙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창18:13)
그들의 웃음 때문인지 주님은 사라가 잉태할 아들의 이름을 ‘이삭=웃음’이라고 지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기가 막혀서 웃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출생으로 인하여 그들에게 기쁨 넘칠 것임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 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창17:19)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통하여 언약을 세운다고 하셨고 또 그 바로 전에는 아브라함의 씨로 말미암아 만민이 복을 얻을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삭은 그 축복의 근원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무슨 이유로 그 고귀한 씨를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을까요?
성경을 계속 묵상하던 도중에 ‘이삭’의 탄생과 그에 대한 예언이 ‘예수님’과 매우 비슷하다는 것이 떠올랐습니다. 첫 번째는 초자연적인 잉태에 대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마리아의 불신앙에 대해 천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눅1:34)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눅1:27)
이삭과 예수님의 공통점은 그 이름에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잉태할 아들의 이름을 직접 지어주심과 동시에 언약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니라 하니라.”(마1:21)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러 가는 과정에 있어서 삼일 길을 걸어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으로 갑니다. 그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이삭으로 하여금 직접 지고 가게 만듭니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이삭은 ‘번제’는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은 굳건했습니다. 비록 자기의 생명보다 사랑하는 아들이지만 그 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리라.”(창22:8)
이삭은 놀랍도록 순종했습니다. 그 자신이 결박당하여 나무 위에 놓였을 때도 그는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십자가에 친히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바로 그 모습인 것입니다. 칼을 들고 이삭을 막 내려치려 하는 순간 여호와의 사자가 드디어 아브라함을 부릅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구약에서 ‘성자 하나님’으로 자주 해석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 자신이 직접 이룰 구속의 사역을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깊이 깨닫도록 하신 것입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치려 한 순간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사랑이 확인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바라보니 ‘수양’이 수풀에 걸려 있었습니다. 번제로 바칠 제물은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번제인 ‘수양’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그 수양의 피는 유월절 출애굽을 이룬 ‘어린양의 피’이고, 제단에 뿌린 ‘화목제’, 지성소에 뿌린 ‘속죄제’의 피입니다. 결국 그 모든 것은 십자가에서 주님이 흘리실 보혈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땅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여호와께서 준비 하신다’라고 칭하여 그 사건을 길이 후대에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영원한 속죄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민이 복을 얻게 될 것임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그 씨로 인하여 대적의 문을 얻어 사탄의 세력을 꺾고, 그 복음이 세계만방에 전파될 것임을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한사람의 순종으로 인해 만민이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 하였음이니라.”(창22:17-18)
성경은 ‘사랑’이라는 단어의 등장에 있어서 이토록 엄청난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다름 아닌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 또한 서로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5:19)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 하는 것이 마땅하노라.”(요일5:10-11)
거꾸로 말하면 사랑을 모르는 자는 곧 하나님을 모르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요일5:7-8). 하나님과 함께 완전한 축복을 받도록 지음 받았던 우리가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떠나 사탄의 저주에 사로잡히게 된 그 절망 속에서 우리를 건져내신 십자가의 사랑을 모른다면 우린 진정 사랑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육적으로 훌륭한 사랑이라도 그의 근본문제, 영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참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사랑입니다.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도와주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권세와 축복을 알도록 하는 것 이상의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의 범람 속에 의미를 잃어가는 주님의 참사랑의 회복이 절실한 때입니다.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랑을 몰라 고통 받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수천 수만 가지의 문제가 있겠지만 모든 원인은 하나님을 떠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그 결과는 때로는 기아로, 귀신들림, 불치병, 정신병 등으로 나타나며 결국 영원한 지옥의 고통으로 끝을 맺습니다. 우리가 진정 그 사랑을 소유한 자라면, 우리는 당연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가장 큰 소원이며 지금도 이 지구를 운행하시는 유일한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
‘나는 너를 사랑한다.’ 조금은 조심스러워야 할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깨닫는다면 말입니다.
hb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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