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과 성 | [00019] 사랑과 성, 그리고 언약 (5) 보아스, 최후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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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hbh (CCMG)
날 짜 (Date): 1998년 11월 2일 월요일 오전 12시 37분 01초
제 목(Title): 보아스, 최후의 유혹
요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란 영화의 상영문제가 교계의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어서 제목을 비슷하게 지어보았습니다. 오늘 살펴보게 될 ‘룻’은 성경 66권중 유일하게 여성의 이름으로 기록된 주인공입니다. 룻은 여자인데다가 이방인이었는데 성경에 중요하게 등장하고 예수님의 족보에 까지 올랐습니다. 무슨 이유일까요?
때는 기원전 11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사사시대에 베들레헴이 흉년이 들자 엘리멜렉 일가는 이방 땅인 모압으로 이주를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엘리멜렉과 두 아들은 일찍 죽어버리고 남은 엘리멜렉의 아내 나오미와 두 어린 며느리는 커다란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리하여, 나오미는 두 며느리를 모두 모압 친정으로 보내고 풍년의 소식이 들리는 고향으로 돌아오려고 합니다. 시어머니의 강력한 권고에 오르바는 돌아가지만 룻은 끝까지 나오미를 쫓습니다. 룻은 이방인이기는 했지만 언약을 소유한 하나님의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1:16)
유명한 룻의 고백이죠. 룻의 시아버지의 친족 중에는 여리고 사건 때 공적을 세운 보아스란 청년이 있었습니다. 보아스는 자신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 한 아름다운 이방 여인인 룻을 보게 됩니다. 익히 그녀의 믿음과 효행을 들었던 터라 그는 그녀에게 따뜻한 호의를 베풀었죠. 이방인을 멸시하는 이스라엘 풍습에서 그녀를 보호하고자 세심한 배려를 해주었습니다. 감동받은 룻은 나오미에게 돌아와 이야기했고, 보아스가 자신에게 기업을 무를 자, 즉 언약의 계보를 이어가게 할 자임을 알게 됩니다.
믿음의 어머니 나오미는 룻에게 보아스에게서 기업을 무를 작전을 지시합니다. 그리하여 룻은 보아스가 축제 중 취하여 누운 자리에 이불을 들고 들어가 누워 보아스에게 잠자리를 청합니다. 다말과 비슷한 행동을 한 것이죠. 보아스가 기업을 무를 자임은 맞았지만 이러한 행동은 불법적인 것이었고, 들키면 큰 화를 당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현숙하고 아름다운 여인인 룻과 그런 식으로 관계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보아스는 단순한 친족 간에 기업을 무르는 관례를 넘어서 룻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단순한 육체적 관계가 아닌 아내로서 룻을 맞이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있었습니다. 보아스보다 기업을 무를 우선순위를 가진 한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다행하게도 그 사람은 자신의 손해를 우려해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르지 않았고 이에 자연히 룻은 보아스에게 오게 되었습니다.
그사람의 결정을 기다리던 룻과 보아스의 마음이 얼마나 떨렸을까 상상해봅니다. 이리하여 결국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졌습니다. 보아스는 정당한 절차를 거쳐서 룻을 아내로 맞아들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잘못하면 ‘하룻밤의 사건’으로 흐를 뻔한 보아스와 룻의 관계가 두 사람의 사랑과 시어머니 나오미의 기치로 영원한 사랑의 결실을 보게 된 거죠.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참 놀라운 말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룻4:12)
보아스는 바로 다말이 창녀로 변장, 시아버지로부터 얻은 씨, 베레스의 직계 후손이었던 것입니다. 보아스는 그 사건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이에 ‘이방인’이라는 벽을 넘어서 마침내 언약을 가진 여인과의 사랑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다말은 어쩌면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의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외로움과 고통을 겪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말의 희생은 룻이라고 하는 불행했던 이방 소녀의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통해 결실을 맺게 됩니다.
우리는 지난 글을 통하여 오난의 다말을 향한, 단지 쾌락을 위한 ‘성’ 을 보았고, 다말의 유다를 향한 대를 잇기 위한 ‘성’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두 가지 모두 완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레스의 후손 보아스와 룻의 ‘성’을 통해 우리가 회복해야 할 ‘성’이 무엇인지를 제시하고 계십니다. 참 ‘성’은 단지 ‘쾌락’이나 ‘후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여 결혼하고, 언약의 자녀를 잇게 하시는 기쁨의 ‘성’인 것입니다.
구성애 씨의 아·우·성에서도 이 부분을 가장 먼저 지적하더군요. ‘성’은 무엇보다도 새로운 ‘생명’에 관계되어 있다는 것이죠. 두 사람이 사랑하여 결혼하고 자녀를 갖는 것이 균형 있는 ‘성’인데 많은 청소년들은 너무 한쪽 부분만 강조된 성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에 대한 상품화가 빚어낸 결과이겠죠.
룻과 보아스의 모든 것을 넘는 ‘사랑과 성’,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보아스, 정말 멋있는 남자죠?
hbh
글 쓴 이(By): hbh (CCMG)
날 짜 (Date): 1998년 11월 2일 월요일 오전 12시 37분 01초
제 목(Title): 보아스, 최후의 유혹
요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란 영화의 상영문제가 교계의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어서 제목을 비슷하게 지어보았습니다. 오늘 살펴보게 될 ‘룻’은 성경 66권중 유일하게 여성의 이름으로 기록된 주인공입니다. 룻은 여자인데다가 이방인이었는데 성경에 중요하게 등장하고 예수님의 족보에 까지 올랐습니다. 무슨 이유일까요?
때는 기원전 11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사사시대에 베들레헴이 흉년이 들자 엘리멜렉 일가는 이방 땅인 모압으로 이주를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엘리멜렉과 두 아들은 일찍 죽어버리고 남은 엘리멜렉의 아내 나오미와 두 어린 며느리는 커다란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리하여, 나오미는 두 며느리를 모두 모압 친정으로 보내고 풍년의 소식이 들리는 고향으로 돌아오려고 합니다. 시어머니의 강력한 권고에 오르바는 돌아가지만 룻은 끝까지 나오미를 쫓습니다. 룻은 이방인이기는 했지만 언약을 소유한 하나님의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1:16)
유명한 룻의 고백이죠. 룻의 시아버지의 친족 중에는 여리고 사건 때 공적을 세운 보아스란 청년이 있었습니다. 보아스는 자신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 한 아름다운 이방 여인인 룻을 보게 됩니다. 익히 그녀의 믿음과 효행을 들었던 터라 그는 그녀에게 따뜻한 호의를 베풀었죠. 이방인을 멸시하는 이스라엘 풍습에서 그녀를 보호하고자 세심한 배려를 해주었습니다. 감동받은 룻은 나오미에게 돌아와 이야기했고, 보아스가 자신에게 기업을 무를 자, 즉 언약의 계보를 이어가게 할 자임을 알게 됩니다.
믿음의 어머니 나오미는 룻에게 보아스에게서 기업을 무를 작전을 지시합니다. 그리하여 룻은 보아스가 축제 중 취하여 누운 자리에 이불을 들고 들어가 누워 보아스에게 잠자리를 청합니다. 다말과 비슷한 행동을 한 것이죠. 보아스가 기업을 무를 자임은 맞았지만 이러한 행동은 불법적인 것이었고, 들키면 큰 화를 당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현숙하고 아름다운 여인인 룻과 그런 식으로 관계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보아스는 단순한 친족 간에 기업을 무르는 관례를 넘어서 룻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단순한 육체적 관계가 아닌 아내로서 룻을 맞이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있었습니다. 보아스보다 기업을 무를 우선순위를 가진 한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다행하게도 그 사람은 자신의 손해를 우려해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르지 않았고 이에 자연히 룻은 보아스에게 오게 되었습니다.
그사람의 결정을 기다리던 룻과 보아스의 마음이 얼마나 떨렸을까 상상해봅니다. 이리하여 결국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졌습니다. 보아스는 정당한 절차를 거쳐서 룻을 아내로 맞아들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잘못하면 ‘하룻밤의 사건’으로 흐를 뻔한 보아스와 룻의 관계가 두 사람의 사랑과 시어머니 나오미의 기치로 영원한 사랑의 결실을 보게 된 거죠.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참 놀라운 말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룻4:12)
보아스는 바로 다말이 창녀로 변장, 시아버지로부터 얻은 씨, 베레스의 직계 후손이었던 것입니다. 보아스는 그 사건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이에 ‘이방인’이라는 벽을 넘어서 마침내 언약을 가진 여인과의 사랑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다말은 어쩌면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의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외로움과 고통을 겪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말의 희생은 룻이라고 하는 불행했던 이방 소녀의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통해 결실을 맺게 됩니다.
우리는 지난 글을 통하여 오난의 다말을 향한, 단지 쾌락을 위한 ‘성’ 을 보았고, 다말의 유다를 향한 대를 잇기 위한 ‘성’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두 가지 모두 완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레스의 후손 보아스와 룻의 ‘성’을 통해 우리가 회복해야 할 ‘성’이 무엇인지를 제시하고 계십니다. 참 ‘성’은 단지 ‘쾌락’이나 ‘후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여 결혼하고, 언약의 자녀를 잇게 하시는 기쁨의 ‘성’인 것입니다.
구성애 씨의 아·우·성에서도 이 부분을 가장 먼저 지적하더군요. ‘성’은 무엇보다도 새로운 ‘생명’에 관계되어 있다는 것이죠. 두 사람이 사랑하여 결혼하고 자녀를 갖는 것이 균형 있는 ‘성’인데 많은 청소년들은 너무 한쪽 부분만 강조된 성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에 대한 상품화가 빚어낸 결과이겠죠.
룻과 보아스의 모든 것을 넘는 ‘사랑과 성’,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보아스, 정말 멋있는 남자죠?
hb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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